스포트라이트
2019년 10월 16일 11시 04분 KST | 업데이트됨 2019년 11월 05일 17시 13분 KST

‘맞을만해서 때린 거다’, ‘오죽했으면 죽였겠냐’는 말에 호주는 이렇게 대처했다

Beyond Gender |호주 1 - 로지 배티와 '미투'가 사람들이 폭력을 말하는 방식을 바꿨다

Charday Penn via Getty Images

*편집자 주: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배운 성별 고정관념이 훗날 성차별이나 여성혐오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들이 있습니다. 전문가들이 성평등 교육의 중요성에 주목하는 이유입니다. 허프포스트가 직접 다녀온 인도, 스웨덴, 호주의 성평등 교육 현장 이야기를 4주 동안 전합니다.

“때린 거 맞다. 아내가 맞을 만한 행동을 했다. 베트남에 있을 땐 한국말을 잘 하더니 갑자기 못한다고 해서 답답해서 때렸다. 쓰레기도 안 버리고 살림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나 좀 관심 좀 가져달라고, 신경 좀 써달라고 그런 거다.”

 

“오죽하면 그랬겠나. 색시가 도망가서 홧김에 (처제를 죽인) 사건이 난 거다.” 

 

-한국에서 일어난 폭력 사건의 가해자와 주변인들이 했던 말들

많은 나라에 가정폭력에 관한 법이 있지만, 호주에서는 가정폭력이 좀 더 중심적인 국가 의제로 다뤄진다.

매주 여성 한 명이, 현재나 과거의 남편이나 애인 등 가까운 사이의 남성에게 살해당한다는 통계는 가정폭력과 데이트폭력의 심각성을 말할 때 자주 인용된다. (*한국은 2017년 한해 동안 85명으로 한 주에 1.6명꼴. 한국여성의전화 언론 보도 분석 결과)

KBS '제보자들'

호주에서도 가정폭력 문제는 한국과 비슷하게 ‘늘 있었던 일’, ‘불우한 환경 때문에 생기는 일’ 정도로 간주됐다. 하지만 지난 2014년, 교육 받은 중산층 백인 여성이었던 로지 배티가 겪은 사건 이후 이런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헤어지기 전부터 정서적, 신체적으로 가족을 괴롭혀 온 로지의 전 배우자가 로지와 함께 살던 자신의 아들을 찾아가 잔인하게 살해한 사건이었다. 많은 사건들 중 하나로 묻힐 뻔 했지만, 로지가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소수인종으로 차별받지도, 가난하지도 않았지만 배우자의 폭력적인 행동을 아무리 신고해도 제대로 된 도움을 받지 못 했다는 그의 증언은 많은 호주 사람들에게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경각심을 줬다.

로지는 아들의 이름으로 가정폭력의 위험을 알리는 재단을 설립하고 활동가로 나섰으며, 이듬해인 2015년 ‘올해의 호주인’으로 선정됐다.

Newspix via Getty Images
로지 배티가 아들 루크 배티를 그린 그림 앞에서 찍은 사진.

로지 배티 덕분에 촉발된 대중의 관심은 지난 5년간 호주 정부와 언론을 움직였다. 로지의 뒤를 이어 자기가 겪은 피해를 공개한 여성들, 그리고 세계적인 미투 운동의 등장으로 호주 사회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가정폭력과 데이트폭력을 두고 폭력배들이 저지르는 일이라고 외면하는 대신, 아주 어려서부터 예방 교육을 하자는 공감대가 생겼다. 가해자를 두고 ‘좋은 동료이자 이웃이었다’며 공감하거나, 피해자의 태도를 문제 삼는 보도도 줄었다.

여러 가지가 맞아떨어지면서 예전부터 오랫동안 이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해온 이들의 노력도 다음 궤도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20여년 간 호주에서 폭력 피해자를 도와온 이들은 허프포스트에 이 때의 의미를 이렇게 평가했다.

“로지 이전에는 그런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몇 시간 전에 아들이 살해돼 처절하게 울부짖는 엄마의 모습도, 또 백인 여성이 자기가 가정폭력을 당했다며 TV에서 이야기하는 모습도 본 적이 없었죠. 누구나 로지의 이야기를 알아요. 언제든, 누구와든 가정폭력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가 된 겁니다. 그게 매우 큰 변화였죠.” (폭력예방단체 DVNSW 대표 무 바울쉬)

 

“부유한 사람들은 신체적, 경제적, 감정적 학대를 당해도 창피하게 생각해서 말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지만, 로지는 달랐죠. 또 ‘미투’가 사람들이 성폭력을 말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줬어요. ‘여자애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고정관념에 도전한 거죠. 누가 그런 식으로 말했을 때 옆에서 그러지 말라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많아졌고요.” (호주 YWCA 디렉터 섀넌 라이트)

공적 시스템과 목격자들이 있지만 외면 당한 여성의 이야기는 ‘맞을만 했으니 때렸고, 오죽했으면 죽였겠냐’는 한국 사건들의 가해자와 주변인들을 떠올리게 한다. 여성과 그 아이들이 자기 집에서 공격 당하는 문제를 ‘폭력 성향이 있는 사이코패스가 저지른 강력범죄’라는 말로 한 데 묶을 수 없는 이유다.

Lucy Nicholson / Reuters
"우리는 물건이 아니다" 2017년 11월 미국 LA 할리우드에서 열린 #미투 행진에 등장한 피켓
Kim Hong-Ji / Reuters
2018년 8월 한국 서울에서 열린 여성의 날 행진에서 참가자들이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피켓과 붉은 장미를 들고 있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3년, 한국에서도 남성에 의한 폭력의 원인을 더 많은 각도에서 들여다보려는 시도가 늘고 있다.

어느 때보다 가정폭력에 대한 인식이 높다는 호주 사회는 지금 어떤 길을 찾아 가고 있는지 듣고 싶었다. 허프포스트가 지난 6월과 7월, 시드니와 멜번에서 이 문제에 직접 뛰어든 이들을 만났다.

아래는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구분하는 유아 교육을 바꾸고자 하는 이들, 십대들이 왜곡된 포르노로 연애와 섹스를 배우지 않도록 성교육을 보완하고자 하는 이들, 그리고 이미 폭력 가해자가 된 성인 남성들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들이다.

 

→ [Beyond Gender] 호주 성평등 기획취재 2편 “여성을 일상적으로 비하하는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 일어난다”로 이어집니다.

 

[Beyond Gender Project] 

1편. 인도

‘여성에게 위험한 나라 1위’ 인도의 ‘페미니즘 학교’를 찾아갔다

18세에 억지로 결혼해야 했던 소녀는 ‘위대한 교육자’가 되었다(인터뷰)

”남자가 성평등 교육을 받는 이유는 ‘더 나은 남자의 삶’을 위해서다”

2편. 호주

”맞을만해서 때렸다”는 말에 호주는 이렇게 대처했다

- “여성을 일상적으로 비하하는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 일어난다”

가부장적인 남성들과 가부장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법

”포르노가 성교육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

호주 학교들은 어린이들에게 ‘젠더 공교육’을 한다

조카에게 사주는 핑크색 머리띠가 왜 문제인 걸까?

3편. 스웨덴

- ’라떼파파’들은 아이 키우기를 피하지 않는다

- “나는 여자 안 때린다”고 말하는 남자들 뿐이라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스웨덴 남성 페미니스트 단체 MÄN(맨)

- 세계 최초로 ‘페미니스트 정부’ 표방한 나라의 장관이 한국인에게 전한 말

- 이 나라의 유치원에는 ‘남자아이’, ‘여자아이’가 없다

4편. 한국

- ”유치원부터, 교대부터 바뀌어야 한다” 현직 초등교사들이 말하는 성평등 교육

- ”남자는 우는 거 아니야” 어린이집 교사들에게 이 교육이 필요한 이유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취재 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