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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6월 22일 13시 34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06월 22일 14시 12분 KST

누가 어려운 시대를 살아간 젊은이를 단죄할 수 있을까

형의 행방을 찾았던 "동생"이 그의 마지막 모습을 자세히 알게 된 것은 광복부터 무려 40년이 지난 1985년. 그러나 "동생"이 마주한 것은 더욱 어려운 현실이었다. 물론, 그 중 하나는 제2차대전 이전 한반도 "청구권"에 관한 모든 문제는 1965년에 체결된 한일조약으로 모두 해결됐다는, 일본 정부의 완고한 자세였다. 그러나 냉담한 태도를 보인 것은 일본 정부만이 아니었다. 70년에 걸쳐 형의 명예회복과 보상을 요구하며 활동해온 "동생"이 유일하게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친일파 인정"일 뿐이었다. "동생"은 말한다. "적어도 특공 전사라는 인정을 일본 정부가 취소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하면 조금이나마 형의 부담이 가벼워진다고 한다.

Keystone via Getty Images

이것은 한 형제의 이야기다.

지금 여기에 한 장의 이력서 사본이 있다. 주인은 "육군 중위 다카야마 노보루". 일제 말기에 일본군에 입대한 한국인 군인이다. 한국 이름을 최정근이라고 한다.

1921년 함경북도 경흥군 경흥면이라는 소련 국경에 가까운, 탄광으로 알려진 한반도 북동쪽 땅에서 태어났다. "그"의 친가는 작은 마을의 지주였다. 아버지는 만주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사와 물물교환으로 부자가 된 후 중-소 양국과 삼각무역이 가능한 경흥군에 이주한 경력이 있다. 현지에서는 친일적인 인물로 알려졌으며, "그"의 동생 또한 일제강점기에 경찰관을 지냈다.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그"의 인생이 크게 바뀐 것은 1939년. 중등학교를 마친 "그"가 진학한 학교는 한반도나 일본의 대학교가 아니라 육군 예과사관학교이었다. 경성제국대학 예과에도 합격하는 등 성적이 우수한 "그"가 법조계의 꿈을 포기하고 육군 예과사관학교에 진학한 이유는 아버지의 강한 권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침 한반도에서는 1938년부터 지원병 제도도 도입되었으며, 일제하 한국인에게 "일본 군인으로서 출세하는 기회"가 널리 주어지기 시작한 시기였다. 덧붙여서 전년의 통계에 따르면 32명의 한국인 응모자 중 육군 예과사관학교에 합격한 사람은 불과 1명밖에 없었으니, "그"의 성적이 뛰어났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렇게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2년전인 1937년 항공병과 장교 양성을 위해 육군 도코로자와(所沢) 비행장에 설립된 육군 항공사관학교의 분교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1941년에 2년의 예과를 마친 "그"는 즉시 대만 자이(嘉義)에 있던 비행 제14전대에 배속되는 동시에 육군 항공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사관학교 졸업은 1943년이었다. 그 후 한동안 "을종 학생"으로 일본 호코타(鉾田) 육군 비행학교 부속 후쿠시마현 하라마치(原町) 비행장에서 경폭격기인 99습격기의 조종을 배우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여자 정신대로 동원된 일본인 여성을 알게 되어 약혼까지 했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그 후 제66전대에 배속된 "그"는 만주에서 중국으로 건너가 필리핀 루손 섬으로 배치되는 등 이리저리 옮겨다니다 1944년에 레이테만 전투에도 참가했다. 소속 부대가 큰 타격을 받았지만 살아남은 "그"는 이후 오키나와 전투에 참가하게 된다. 그리고 1945년 4월 2일, 전날에 오키나와 상륙을 시작한 미군 함정에 대한 초계 임무를 위해 3기 편대의 소대장으로 가고시마현 도쿠노시마(徳之島)에서 날아오른 "그"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됐다. 소속 부대인 제66전대는 "평소 용기 있고 활달했으며, 공격 정신이 넘쳤다"는 이유로 "그"를 "특공 전사(戰死)"로 인정했다. 이러한 "그"에게 육군 제6 공군도 "표창장"을 수여했다. 그와 결혼을 다짐했던 일본인 여성은 평생 결혼하지 않고 "그"를 계속 사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이러한 과정은 한반도에 남겨진 유족들에게 전혀 전해지지 않았던 것이다. 2차대전 종전 후 한반도에 있던 사람은 종전 직전에 전사한 가족에 관한 전사공보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상황에서 "그"의 아버지는 아직 중학생이던 "남동생" - 그의 이름은 최창근이라고 한다 - 에게, 패전 후 혼란 상태였던 일본에 가서 "그"의 생사를 알아보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전지에서 보내온 몇 장도 안 되는 편지 등만으로 "형"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가족은 그 후에도 "그"의 소식을 알 수 없어 장례식은 물론, 무덤을 만드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이후에도 계속 형의 행방을 찾았던 "동생"이 그의 마지막 모습을 자세히 알게 된 것은 광복부터 무려 40년이 지난 1985년. 일본의 지인으로부터 그 해 발행된, 한국인 특공대원에 대해 기록한 이이오 겐지(飯尾憲司)의 책, "가이몬다케(開聞岳)"에 형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히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다. 이렇게 형의 죽음을 확인한 "동생"은 1990년대에 들어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회" 활동에 참여하면서, 이후 다른 유족들과 함께 일본 정부에 보상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동생"이 마주한 것은 더욱 어려운 현실이었다. 물론, 그 중 하나는 제2차대전 이전 한반도 "청구권"에 관한 모든 문제는 1965년에 체결된 한일조약으로 모두 해결됐다는, 일본 정부의 완고한 자세였다. 그러나 냉담한 태도를 보인 것은 일본 정부만이 아니었다. 한일조약 협상 과정에서 한일 양국이 한국인 군인, 군속의 문제를 고려하면서 협상을 벌인 것은 너무 분명하고, 그러므로 한국 정부 또한 일본 정부와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군인, 군속으로 종사한 사람에 대한 보상 문제는 이미 해결됐다는 견해를 밝힌 것이다.

그런데 그뿐이라면 "동생"의 고민은 그다지 깊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1965년 한일조약의 전 일본 군인, 군속에 대한 보상 등을 근거로 일본 정부로부터 "경제 협력금"을 얻은 한국 정부가 극히 소액의 하나마나한 정도의 "보상"을 유족에게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 정부는 1974년 전 일본 군인, 군속과 징용 피해자에 대해 "경제 협력금"에서 1인당 30만원의 "청구권 보상금" 지급을 결정한 바 있다. 2005년에는 한국 정부가 한일조약에 관한 한국 측 외교문서를 공개하면서 "국외로 강제동원되어 그 기간 중 또는 국내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강제동원희생자 유족에게 피해자 1인당 2000만원의 "위로금"을 새로 지급하는 결정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 정부의 결정은 "동생"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큰 고통과 굴욕의 원인이 되었다. 예를 들어, "위로금" 지급을 정한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은 "강제동원 희생자, 강제동원 생환자 또는 미수금 피해자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에 규정된 친일 반민족 행위를 한 경우에는 '위로금'을 지급하지 않기"로 천명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인용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에는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소위(少尉)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가 전형적인 "반민족 행위"로 예시되어 있다. 또한 한국에서는 이전부터 특공대 전사자를 "일왕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한 전형적인 친일 협력자"로 보는 경향이 있으며, 2008년에는 한국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한일교류사업에 앞장서온 일본인 여배우 구로다 후쿠미 씨​​가 조선인 특공대원의 기념비를 세우다가, 제막식도 하지 못한 채 주민 등의 반대로 기념비가 철거된 사건도 벌어졌다.

즉, 1939년이라는 이른 시기에 스스로 일본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일본군 "특공 전사"로 인정된 형은 거의 자동으로 일본의 전쟁에 가담한 전형적인 "친일파"로 낙인찍힌 셈이다. 실제로 "동생"이 한국 정부에 제출한 "위로금" 신청에 대한 답변으로 받은 서류에는 그 이유가 명백하게 적혀 있다. 즉, 70년에 걸쳐 형의 명예회복과 보상을 요구하며 활동해온 "동생"이 유일하게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친일파 인정"일 뿐이었다. "동생"은 말한다. "적어도 특공 전사라는 인정을 일본 정부가 취소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하면 조금이나마 형의 부담이 가벼워진다고 한다.

머지않아 올해도 더운 여름이 온다. 8월이 되면 또 전쟁 사망자를 둘러싸고 다양한 논의가 전개될 것이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 주시기를 바란다. 과거에 일본의 전쟁을 위해 죽었던, 혹은 죽을 수밖에 없었던 한반도와 대만 출신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 중 일부는 일본을 위해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조국에서 굴욕적인 상황에 빠져 있다. 그것은 그들이 치른 크나큰 희생의 대가로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은 것으로 필자에게는 보인다.

물론, 그들의 행보를 "전형적인 친일파"로 보고, 그러므로 그들이 당연히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의견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주셨으면 한다. 많은 한국의 역사서에는 "일제하에서 지원은 실질적으로 강제이고, 사람들은 이를 거부할 권리는 없었다"고 쓰여 있다. 그렇다면 왜 그런 논리는 당시 일본군에 지원한 사람에게는 적용되지 않는가. 이 글에서 소개한 사람의 경우도 원래 자신은 경성제국대학에 진학하고 법률 분야에서 활약하는 것을 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일전쟁이 격화되는 바람에 아버지의 권유를 받아들여 사관학교로 갈 수밖에 없었다. 원래 그들은 일제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며, 그들이 그 교육의 결과 일본에 협력하기를 선택하게 된 것은 자신의 적극적인 선택의 결과라기보다는 그 교육의 성과였다.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교육에 감화된 책임까지도 그들이 져야 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을까.

그리고 같은 얘기를 그들의 유족에 대해서도 할 수 있다. 자신의 아버지나 형을 잃은 그들의 해방 후의 생활은 몹시 어려웠고, 가계의 기둥을 잃고 해방 후 한국 사회에서 가난하게 살아가야 했다. 만일 그들의 아버지나 형에게 죄가 있더라도, 그 유족이 70년이 지난 후에도 책임을 져야 하는가.

이완용 등 한일 강제합병 시기의 거물 "친일파"와 달리 태평양 전쟁기의 "친일파"는 나이도 젊고 일제하에서 아무런 적극적인 역할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입장은 오늘 격렬한 비난을 받는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사람과 유사하다. 어려운 권위주의 체제기를 살아온 한국인은 당시 상황에서 정권에 저항하며 맞서 대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한국인이 일제강점기 상층부에서 통치를 이끈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이해가 잘 간다. 필자 또한 일본인으로서 그 책임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같은 책임을 당시 아직 20대에 접어든 젊은이나 그 유족에게도 요구하는 것은 과연 합당할까. 광복 7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굴욕적인 입장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좀 더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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