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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3월 10일 15시 23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05월 10일 14시 12분 KST

"I don't want to survive. I want to live."

남의 나라에서 벌어졌던 비극인 이런 흑인 노예의 역사가 지금 우리에게 왜 중요한 것일까. 권력을 쥔 자들이 잘못 만든 제도로 인해 박해받을 수밖에 없는 힘없는 약자들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소수의 권력자와 다수의 약한 자들이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단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박해받는 현실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간과해도 우리, 혹은 나와 상관없을까?

판씨네마

<노예 12년>, 인종 차별의 야만성을 고발한 잔혹한 기록

1979년 TV에서 방영했던 미니 시리즈 <뿌리>의 인기는 엄청났다. 갖은 폭력과 끔찍한 고문, 비열한 강간, 고된 노동으로 범벅이 된 드라마였으니까. 그런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온 가족이 TV 앞에서 숨죽이며 지켜보곤 했다. 지금이라면 19금 딱지가 붙고도 남았을 텐데 어째서 아무런 제재가 없었던 것일까? 당시엔 실제로 흑인을 본 사람조차 거의 없었으니, 아마도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딴 세상 구경하듯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린 나에게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끝까지 살아남은 강한 의지의 소유자 '쿤타 킨테'라는 주인공 이름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글이글 타오르던 눈동자, 포대에 싸인 아기를 높이 쳐들며 '뿌리'를 잃지 말라고 기원하던 마지막 장면도 뇌리에 남아 있다. 나중에야 알렉스 헤일리라는 유명 작가가 할머니의 구술을 듣고 쓴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드라마라는 걸 알았다.

그후 교과서에 실린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읽고, 세계사 시간을 통해 노예 해방에 기여한 링컨 대통령과 남북전쟁에 대해 알았다. 《뿌리》는 물론 《칼라 퍼플》이나 《앵무새 죽이기》 같은 흑인 문학을 찾아 숨죽여 읽었다. 영화 <파워 오브 원>이나 <사라피나>를 보면서 남아공의 인종 비극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혁명가 말콤 X와 넬슨 만델라를 존경하는 인물 리스트에 올릴 만큼 내 생각은 성장했다. 가수 마이클 잭슨이 죽어서도 위대한 전설로 남고, 미국 최초로 흑인 오바마가 대통령이 될 정도로 세상 또한 많이 달라졌다.

이렇게 피부색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게 된 지금, 텔레비전에서 다시 <뿌리>를 방영한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향을 일으킬까. 여전히 남의 나라 <동물의 왕국>을 보는 것 같을까? 그로부터 30여 년의 시간이 흐른 2014년 3월, 우리는 그보다 한층 더 드라마틱한 영화 <노예 12년>을 만났다. <뿌리>를 보지 못한 요즘 젊은 세대에게 과연 그런 충격적인 인종 차별의 역사가 어떤 느낌으로 받아들여질지 궁금하다.

<노예 12년>은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840년대, 노예제도가 횡행하던 미국의 남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자유로운 신분으로 태어났으나, 흑인이라는 이유로 불법 납치되어 12년간 노예 생활을 하다가 극적으로 풀려난 솔로몬 노섭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1808년 뉴욕에서 태어난 솔로몬은 세 아이를 둔 가장이자 성실한 남편이요, 바이올린 연주자로 일하는 자유인이었다. 부부가 쉬지 않고 열심히 노동해서, 가난하지만 언젠가는 풍족하게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안고 살았다. 그러다 1841년, 일거리를 소개해주겠다는 두 남자의 꼬임에 넘어가 길을 떠났다가 납치당해 하루아침에 노예 신세로 전락했다. 제임스 버치라는 악명 높은 노예 상인에게 잡혀 있던 솔로몬은 배에 태워져 머나먼 남부의 뉴올리언스 주로 팔려 간다.

플랫이란 이름을 달고, 다행히도 처음엔 루이지애나 주에 사는 사람 좋은 목사 윌리엄 포드에게 팔렸다. 그러나 주인의 재정 상태가 악화되자 존 티비츠라는 악인에게 넘겨지면서 끔찍한 고난이 시작된다. 특히 주인이 억지를 부리는 걸 견디다 못해 저항했다는 이유로 올가미에 목이 걸린 채 나무에 매달려 있던 장면은 오랫동안 잊지 못할 불편함을 전해준다. 뜨거운 여름날, 사방에서 한가롭게 매미가 울어대고 다른 노예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주위를 왔다갔다한다. 오직 플랫만이 목이 졸리지 않게 까치발로 간신히 몸을 지탱하면서 끔찍한 갈증을 견디는 그 기나긴 시간이라니!

그 죽음의 끝에서 간신히 살아나지만 다시 잔인한 술주정뱅이 에드윈 엡스에게 팔린다. 그후 가축에게나 주는 음식을 먹고 거친 담요 한 장 두른 채 남녀가 뒹굴며 자면서, 동틀 무렵부터 자기 전까지 고된 노동과 생명의 위협, 가학적인 채찍질이 10년간이나 이어진다. 그리고 1853년, 양심을 지닌 한 백인의 도움으로 편지를 써서 간신히 그 지옥에서 구출된다.

'자유로울 권리, 인간답게 살 권리를 포기하지 않은 용기'를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노예 12년>은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온 여타의 순종적인 흑인 노예 영화와는 다르다. 솔로몬 노섭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인이었고, 따라서 납치된 순간부터 노예로서의 체념이란 단 한 번도 없었다. 한 번 자유를 만끽해본 사람은 그 맛을 잊을 수 없는 법이다. 무자비한 자들의 손아귀에서 기약 없는 고통을 당하며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도 여러 번 했다. 그러나 늘 자유에 대한 희망을 놓치지 않고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했기에 결국은 자유의 몸이 되어 가족의 품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결국 노예 해방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이런 긴 체험담을 후세에 전할 수 있었다.

2013년, 영상 아티스트로 유명한 영국 출신의 흑인 스티브 맥퀸(설마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시는 분은 없겠지? 우리가 아는 <타워링>에 나온 그 유명했던 영화배우가 아니다. 그분은 이미 30년 전에 고인이 되었음) 감독이 <노예 12년>을 그의 세 번째 영화로 선택했다. IRA의 리더로 교도소에 수감된 보비 샌즈의 단식투쟁을 그린 <헝거>(2008), 뉴욕 여피족의 쓸쓸하고도 은밀한 일상을 그린 <셰임>(2011) 등 늘 소수자 편에 선 시선을 담은 단 두 편으로 거장의 반열에 올라선 감독이기에 당연히 영화계의 관심이 한 몸에 쏟아졌다.

더군다나 브래드 피트가 중요한 카메오로 출연하는 것은 물론 그의 제작회사인 플랜비(아카데미 작품상 수상과 함께 국내에서 흥행을 거둔 <슬럼독 밀리어네어>와 지난 해 큰 호응을 얻은 <월드워 Z>의 제작진)가 참여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과연 <노예 12년>은 제71회 골든글로브 최다 부분에 노미네이트되어 당당히 드라마 부문 작품상을 거머쥐었다. 이미 런던과 뉴욕의 비평가 협회상 등을 수상해 냉혹한 평으로 유명한 비평가들의 반응조차 뜨거웠다. 3월 2일에 펼쳐진 제8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작품상을 포함하여 3관왕이 되었는데, 흑인 감독이 연출한 영화가 작품상을 받은 건 아카데미 역사상 처음이다.

더 이상 화려할 수 없는 등장배우들로 인해, 개봉하기 전부터 한국 독자들의 기대감을 한껏 부풀게 했다. 실제 솔로몬 노섭의 초상과 닮았다 하여 캐스팅된 치웨텔 에지오포가 시종일관 간절함을 담은 표정으로 노섭 역을 열연했다. <제인 에어>에서 미아 와시코브스카와 함께 로체스터 역을, <셰임>에서 은밀한 이중생활을 하는 성공한 뉴욕 여피족의 휑한 눈동자 연기를 보여줬던 마이클 패스벤더가 악명 높은 농장주 에드윈 엡스로 변신했다. 우리나라에선 TV 시리즈 <셜록>으로 인기가 높은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오디션까지 참여하면서, 노예를 존중해주는 첫 번째 주인 윌리엄 포드 역을 따내 좋은 이미지를 이어갔다.

게다가 영화 음악의 거장인 한스 짐머가 참여한 OST 또한 음반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전체 프로듀싱을 맡은 존 레전드가 장례식 장면에서 흐르는 을 특별 버전으로 다시 불렀는데, 흑인 노예들의 가슴 아픈 비운을 담은 채 가슴 밑바닥에서 뽑아내는 듯하여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듣고 싶을 거라 장담한다.

그렇다면 남의 나라에서 벌어졌던 비극인 이런 흑인 노예의 역사가 지금 우리에게 왜 중요한 것일까. 권력을 쥔 자들이 잘못 만든 제도로 인해 박해받을 수밖에 없는 힘없는 약자들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소수의 권력자와 다수의 약한 자들이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단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박해받는 현실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간과해도 우리, 혹은 나와 상관없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얼마 되지 않은 지난 20세기에만도 남아공에서 잔인한 인종 차별 전쟁이 벌어지고 나치의 유대인 말살 조치가 떡하니 벌어졌듯이, 어쩌면 우리도 피부색이나 국적에 따라 다른 인간에게 학대를 당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재산이나 종교, 생김새에 따라, 어쩌면 단지 약한 여성이라는 이유로 아니면 힘없는 어린이라는 이유로도 그와 비슷한 차별을 받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박해받는 약자에게 보내는 시선, 잘못된 제도의 개선, 그리고 부당한 권력자에 대한 엄중한 처벌은, 그들뿐 아니라 언제 어떻게 소수자로 전락할지 모르는 우리 자신까지 보호하는 단단한 양심과 연대가 되는 것이다.

생명의 존엄성을 지닌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 모두는 누구나 뜨거운 태양 아래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 권리가 있다. '자유를 향한 불굴의 의지'로 살아남아 '노예 해방'의 도화선이 된 위대한 흑인 솔로몬 노섭의 절절한 호소야말로 <노예 12년>이 우리에게 주는 강렬한 메시지인 것이다.

"노예제도의 존재가 인간의 잔인한 본성을 더 악화시키는 것 같았다. 날마다 인간이 고통받는 모습을 목격하면 잔인하고 무감각해지게 마련이다. 노예들이 괴로워 내지르는 비명을 듣고, 무자비하게 채찍질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죽어 관도 없이 묻히는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인간의 목숨을 중히 여길 수 있겠는가."--솔로몬 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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