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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3월 14일 05시 39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05월 14일 14시 12분 KST

어린이 방송 콘텐츠에서 문화적 다양성을 외치다

BBC는 내부 제작 가이드라인을 통해 3인 이상의 어린이가 출연할 시 반드시 소수인종의 어린이를 포함하도록 하고 있다. 평균적으로 5명의 어린이가 등장할 시 3명 이하의 백인과 1명 이상의 아시아계, 1명 이상의 흑인 어린이가 여기에 포함되며, 더불어 거의 동등한 수의 남녀 성비도 맞추도록 되어있다.

유년 시절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앞 시장 골목에는 나이 많은 한 지체장애인이 항상 구걸을 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앞에 있는 시장의 특성상 방과후 엄마와 함께 장을 보러오는 아이들이 많았다. 대부분의 어린 아이들은 처음 그 노인을 보고 부모에게 질문을 했다. "엄마 저 할아버지는 왜 저기 저러고 있어?" 혹은 "저 할아버지는 왜 저렇게 더러워? 다리가 이상해" 정도의 범주를 넘지 않는 질문들이었다. 그러면 십중팔구 엄마들의 대답은 "신경쓰지 마!", "너도 엄마 말 안 듣고, 공부 안하면 저렇게 거지된다. 알았어?" 정도의 수준이었다. 가끔씩은 장난기가 많은 아이들이 그 장애인 노인에게 빈 우유팩이나 종이 뭉치를 던지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고, 그 때마다 주변에 있던 또래의 아이들은 그것을 하나의 유희로 삼으면서 즐거워했던 기억이 있다. 아이들에게는 구걸을 하던 장애인 노인이 부모말을 안듣고 공부를 게을리 해서 결국 저렇게 되었다고 인식되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끔찍하리만치 가슴 아픈 기억이자 당시 일상의 교육 수준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어린이들에게 있어 교육이란 사회를 바라보고 판단하는 가치관을 정립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제작되는 TV 프로그램은 매우 중요한 사회적 역할을 맡는 것임에 분명하다. 더욱이 공공서비스의 영역으로 간주되는 지상파 방송을 통해 방영되는 어린이 프로그램은 모든 사회 구성원들을 공정하게 반영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영국의 어린이 프로그램은 이미 세계적으로 가장 교육적이고 창의적인 콘텐츠로 평가받아 왔다. 이것은 단순히 막대한 자금을 투자한 결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문화적 다양성에 입각한 불편부당한 콘텐츠 개발'이라고 하는 프로그램 제작의 가이드라인으로부터 기인한 것으로 해석된다.

미국의 디즈니 만화나 헐리웃에서 제작된 어린이 프로그램들의 특징은 건장한 백인 남성 캐릭터와 금발의 백인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나오고 있으며, 유색인종과 장애인(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잭 선장, 한쪽 손이 없는 후크 선장, 등이 굽은 마귀할멈 등)은 대부분 조연 혹은 악당의 이미지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문화 콘텐츠에 익숙한 아이들은 백인에 대한 막연한 존경심과 함께 유색인종이나 장애인에 대해서는 이유 없는 적대감과 차별적 시선을 가지게 되며, 그 결과는 오늘날 30대 이상의 상당수 한국인들의 정서적 가치관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90년대 후반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에 입각한 다문화주의와 다양성에 대한 존중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영국에서는 2003년 새로운 미디어법인 "Communication Act 2003"의 등장과 함께 지상파 방송의 어린이 프로그램이 다양성의 원칙에 입각해서 제작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백인 대 유색인종의 비율이 약 9:1 정도로 여전히 백인 중심의 사회다. 그러나 CBeebies(0세~6세를 대상으로 하는 BBC의 유아 전문 채널)나 CBBC(6~12세를 대상으로 하는 BBC의 어린이 전문 채널)에서 방영하는 콘텐츠를 들여다보면 등장인물의 다양성에 대한 제작자들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우선 인종적 다양성은 출연자들의 다양한 인종적 구성으로 확인할 수 있다. BBC는 내부 제작 가이드라인을 통해 3인 이상의 어린이가 출연할 시 반드시 소수인종의 어린이를 포함하도록 하고 있다. 평균적으로 5명의 어린이가 등장할 시 3명 이하의 백인과 1명 이상의 아시아계, 1명 이상의 흑인 어린이가 여기에 포함되며, 더불어 거의 동등한 수의 남녀 성비도 맞추도록 되어있다. 또한 어린이 프로그램 진행자의 경우에도 이와 비슷한 비율의 인종적 구성을 갖추고 있다.

장애인에 대한 다양성도 적극적으로 반영되고 있다. 몇 년전 한국의 인터넷 매체에서도 보도된 바 있지만, CBeebies의 메인 진행자 중 한명인 Cerrie Burnell의 경우 한쪽 팔이 없는 장애인이다. 그녀가 처음 진행을 맡았을 때 영국 내에서도 거부반응을 보이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BBC 집행부는 '장애는 이상하거나 부끄러운 것이 아니며, 장애인들에게도 모든 사회적 활동에 있어 동등한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어린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그녀를 지지해 왔다. 이뿐만 아니라 CBeebies의 인기 어린이 프로그램 중 하나인 "Balamory"에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 캐릭터가 고정적으로 출연하고 있으며, "Me too"에는 시각 장애가 있는 Rudi라는 캐릭터가 친숙하게 등장한다. 장애인과 인종적 다양성 뿐 아니라 등장인물의 직업들도 매우 다양하다. "Balamory"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직업은 작은 마을의 경찰관, 우체부, 조그만 구멍가게 주인, 유치원 선생 등으로 매우 일반적이면서도 다양하다. 또한 "Me too"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재래시장 과일가게의 상인, 기차 승무원, 버스 청소부, 택시기사, 지하철 노동자 등으로 가장 일반적이면서도 서민적인 직업들을 모델로 하고 있다. 이러한 TV 콘텐츠에 익숙한 어린이들은 일상생활에서도 소수인종이나 장애인, 특정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2011년 기준으로 BBC의 어린이 채널 운영비용은 약 1억 2500만 파운드(한화 약 2500억원) 규모이며, 또다른 지상파 방송인 ITV의 경우 약 2500만 파운드(한화 약 500억원)를 투자하고 있다. 물론 한국보다 절대적으로 높은 시청료와 그로 인한 재정적 후원 그리고 어린이 프로그램의 해외 판매를 통한 수익 창출 등으로 인한 경제적 여유를 감안하더라도 단기적인 경제효과가 거의 없는(ITV의 경우 광고수익으로 운영되어야 하지만, 어린이 시간대에 방영되는 광고는 영국 내 어린이 보호법상 많은 제약을 받기 때문에 광고를 구하기도 쉽지 않은 실정이다) 어린이 프로그램에 이만한 자금을 투자하기란 쉽지 않다. CBeebies의 책임자인 마이클 캐링턴은 '많은 자금을 투자할수록 양질의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으며, 그것은 곧 글로벌 마켓을 통해 더 많은 자금을 벌어들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어린이 프로그램에 대한 투자는 공공성의 측면에서도 받아들여져야 하지만, 시장주의자들에게도 역시 어린이 콘텐츠 시장이 매우 매력적인 투자처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법무부의 발표에 따르면 국내 체류 외국인의 수는 이미 150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비자를 받지 않고 거주하는 외국인까지 포함하면 약 180만 명의 외국인이 한국에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또한 2012년 보건복지부의 통계에 따르면 등록 장애인만 250만여 명 이상으로 집계되고 있다.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과 장애인을 합치면 약 400만여 명 이상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한국의 TV 프로그램, 특히 어린이 콘텐츠에서 이들의 존재를 인식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콘텐츠 다양성의 측면에서도 역시 10년~20년 전의 어린이 프로그램과 별반 다를 바 없다. 다문화 사회를 표방하고, 사회적 인프라가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뽀뽀뽀"와 "TV 유치원"으로 대변되는 한국의 어린이 프로그램들은 시간이 멈춘 듯 정체되어 있다. 갈수록 어린이 프로그램에 대한 투자와 관심이 줄어드는 현실에 대해 모 방송국의 제작부서 담당자는 '요즘 아이들은 학원가기 바빠서 TV를 시청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고 푸념했다고 한다. 물론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렇게 바쁜 아이들도 해외에서 제작된 영어학습용 콘텐츠는 거금을 투자하면서 보고 있다. 어린이 방송 콘텐츠 시장은 분명 과거에 비해 커지고 있는데, 콘텐츠의 다양성은 점차 위축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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