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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6월 11일 17시 26분 KST | 업데이트됨 2019년 06월 11일 17시 26분 KST

이 건축가는 어떻게 종이로 세상을 구했을까?

이 건축가는 어떻게 종이로 세상을 구했을까?

 

 

민음사 제공
행동하는 종이 건축가, 반 시게루

2014년 세계 건축계에서 가장 영예로운 상으로 꼽히는 프리츠커 건축상은 일본의 건축가, 반 시게루에게 돌아갔다. 그의 수상에 대해 프리츠커 건축상을 주관하는 하얏트 재단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반 시게루는 지난 20년간 전 세계의 재해 현장을 돌며 적은 비용으로도 단순하고 위엄 있는 피난처와 공공건물을 지어 고통받는 피해자를 도왔다. 그의 인도주의적 헌신은 모두에게 모범이 되었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었다.” 반 시게루가 어떤 공덕을 쌓았기에 이런 상찬을 받게 되었을까? 『행동하는 종이 건축: 건축가는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는 반 시게루의 건축 세계를 상징하는 ‘종이 건축’의 유래와 쓰임에 초점을 맞춰 한 건축가의 숭고한 삶을 증명함으로써 이런 궁금증을 차분히 해소시킨다.

1957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반 시게루는 최고의 수재들만 입학한다는 뉴욕의 쿠퍼 유니언 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한 엘리트다. 1985년 일본으로 귀국해 처음으로 맡은 프로젝트는 건물이 아니라 핀란드의 건축가, 알바 알토의 가구를 다루는 전시회와 그 전시장 디자인이었다. 알바 알토 특유의 따듯함을 살리기 위해 나무를 사용하고 싶었지만 한정된 예산 속에서 그의 눈길을 끈 것은 다름 아닌 종이 튜브, 즉 ‘지관(紙管)’이었다. 전시회를 마무리하고 반 시게루는 본격적으로 지관을 파고들었다. 새로운 건축 재료이자, 구조체로 기능할 수 있는 지관의 무한한 가능성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지관은 직경과 두께, 길이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고 무엇보다 저렴하며 구하기도 쉽다. 방수 처리가 용이하고 단열, 방음 기능 또한 부족하지 않으며, 재료 자체가 지닌 친환경적 측면은 구조물의 설치와 해체 과정에서 극대화된다. 이런 ‘완벽한 신세계’ 지관에 대한 사회적 편견-‘약해 빠진 종이로 건축을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을 극복하고 난민이 직면한 주거 문제를 해결하는 총아로 격상시킨 건 오롯이 반 시게루의 오랜 뚝심 덕분이다.

민음사 제공
종이 건축의 시발점이 된 '종이의 집'

1994년 르완다 내전으로 생긴 200만 여명의 난민들이 담요만 두른 채 추위에 떠는 사진을 접한 그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유엔 난민 고등 판무관 사무소(이하 유엔 난민 기구)를 찾아가 지관을 활용해 난민을 위한 임시 주택 짓기를 제안했다. 당시 유엔 난민 기구가 보급한 임시 거처의 주 재료는 알루미늄과 플라스틱이었는데, 하루 먹고살기 빠듯한 난민들이 알루미늄을 떼어다 암시장에 내다 팔고 나무를 몰래 벌채해 충당하면서 산림까지 황폐해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지관으로 만든 반 시게루의 임시 주택은 이런 고질적인 문제를 뿌리부터 해결하면서 지관 특유의 탁월한 기능성과 대량의 주택을 짧은 시간에 적은 비용으로 짓는 효율성 덕분에 기존 난민의 주거 환경을 일시에 바꿔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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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전설이 된 '종이 로그 하우스'의 설치 모습

이듬해 일본을 강타한 한신 대지진으로 고베 지역이 폐허가 되자 그는 삶의 터전이 송두리째 날아간 이재민을 위해 임시 주택 시설을 강구했다. 바로 ‘종이 로그하우스’의 탄생이다. 일본의 맥주 회사, 기린에서 공수한 플라스틱 맥주 상자에 모래주머니를 채워 바닥을 단단히 다진 후 방수 처리를 마친 지관을 촘촘히 이어 붙여 한 가구를 위한 단독 가설 주택을 구축해 물리적인 주거 환경을 제공하고 심리적인 안정을 북돋았다. 지진으로 엉망이 된 다카토리 성당 자리에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커뮤니티 홀을 만든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예배 장소를 겸한 이 가설 건축물은 10년 동안 온전히 유지되다 타이완의 지진 피해 지역에 그대로 옮겨진 미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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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동일본 대지진 피해민을 위한 임시 주거 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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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대성당

이후 반 시게루의 인류애적 건축 행위는 비영리 단체인 ‘자원건축가네트워크(VAN)’를 설립하며 전 세계로 확장됐다. 1999년 터키 서북부 대지진, 2001년 인도 구자라트 대지진, 2004년 스리랑카 쓰나미, 2008년 중국 쓰촨성 대지진, 2010년 아이티 대지진,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대지진에 이르기까지 자연 재해에 신음하는 이재민에게 지관을 활용한 가설 주택을 제공하며 인간이 누릴 최소한의 존엄을 지켜왔다. 특히 크라이스트처치의 상징이던 성당이 무너져 모두가 망연자실할 때 향후 50년간 사용 가능한 아름다운 종이 성당을 세워 지역민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새로운 도시의 명물로 승화시킨 일화는 그의 탁월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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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관과 조인트로 이루어진 종이 건축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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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독일 하노버 엑스포 일본관

『행동하는 종이건축』은 이렇게 숨 가쁘게 달려온 반 시게루의 종이 건축 전부를 일목요연하게 다루지는 않는다. 책을 구성하는 내용 대부분이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1998년에 출간한 일본어판에 뿌리를 두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우리와 가까운 이야기는 일본의 건축 잡지 <신건축>에 실린 ‘2000년 독일 하노버 엑스포 일본관’ 내용의 일부와 2016년 진행한 짧은 인터뷰를 별도의 챕터로 삽입한 것이 전부다. 그러므로 앞서 설명한 반 시게루의 건축 세계를 통시적으로 훑는 가이드로는 다소 적절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반 시게루의 저서가 그의 일생을 바꾼 지관 건축의 태동을 소상히 다룬 초기 에세이라는 점은 무척이나 현명한 처사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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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시게루의 종이 건축은 이렇게 아름다운 건물로도 구현된다. 일본 오이타 현립 미술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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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건축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프랑스 '퐁피두메스 센터'

생각해보라. 1994년 르완다 난민 주택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후 2014년 프리츠커 건축상을 받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2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그가 지속적으로 추구했던 박애주의적 건축가의 역할과 태도의 탄생 연유와 초기 상황에 대한 자세한 이해 없이 그저 커리어의 나열을 통해 반 시게루라는 건축가를 처음 접하는 것은 너무도 빈약한 경험이 되지 않을까. 일기처럼 솔직하게 풀어놓는 그의 사적인 고백을 날 것 그대로 접하며 올라오는 따스한 열정을 건너뛰기에는 너무도 아쉽지 않을까. 이번 책이 한 건축가의 삶을 이해하는 여정의 첫 걸음으로 적절하다는 생각이 큰 착각은 아닐 거라 믿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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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한신 대지진 구호 현장

더구나 그가 평생 추구한 지관 건축의 시작과 그의 명성을 높인 초기 프로젝트에 대한 자료를 한국에서 찾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점에서 더욱 반가움이 앞선다. 완공 직후의 준공 사진이 아니라 시공 과정과 더불어 실제 이재민들이 건물을 사용하는 장면, 열정으로 뭉친 자원봉사자의 모습을 담은 사진 자료를 통해 당시 생생한 현장감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는 것 또한 무척 고무적이다. 지관에 대한 자세한 설명, 가설 주택을 짓기 위한 여러 아이디어와 현장의 어려움, 나아가 자금을 어떻게 마련했고, 내외부와 어떻게 소통했는지 ‘행동하는 건축’의 실제 프로세스를 명확히 알려준다는 점에서 재해 상황에 닥친 건축가가 참고할 현실적인 가이드로도 그 가치가 상당하다.

우리나라가 재해에서 안전한 나라는 결코 아니지 않던가. 어떤 대형 사고로 인해 주거 환경이 황폐화되어 가설 건축이 필요할 때 ‘만일 나라면 어떻게 대처할까’, 고민할 기회를 마련하고 ‘행동으로 존재를 증명하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는 이 책은 최초 발행일과는 무관하게 우리 사회에서 활동하는 건축가가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촉매제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어찌 감히…”라는 현실의 두려움을 잊고 건축가로서 느끼는 사회적 책무의 무거움을 실천으로 풀어내면서 공적으로 이바지하고 개인의 자존감을 높이는 선순환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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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종이 건축: 건축가는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건축가는 아름답고 사용감과 거주성이 좋은 건축물을 만들어야 합니다. 업자들은 빠른 시간 안에 저렴하게 만드는 게 사명이겠지만 건축가의 역할은 다릅니다. 우리는 문제점을 해결해 좀 더 아름답고 살기 좋은 집을 구현해야 합니다.” 반 시게루가 말하는 건축가의 역할은 우리 사회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게 통용되는 대원칙이다. 다만 남보다 좀 더 일찍, 좀 더 깊숙이 비루한 현장에서 이를 실천한 그의 존재가 비범할 뿐이다.

그는 자신이 발휘한 진정성과 용기의 원천을 아주 솔직하게 고백한다. ‘자원 봉사는 특정한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자신을 위한 행위’라는 깨달음이다. 난민 돕기에 힘을 쏟는 과정에서 몰아치는 세간의 눈초리를 뒤로하고 사회를 위한 건축가의 역할을 맡은 ‘행동하는 건축가’의 이면에는 ‘제 자신의 구원’이라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사적인 이유가 존재했다. 이렇게 소박하지만 진정성 넘치는 반 시게루의 이야기에 귀를 활짝 여는 태도가 20년 전 책을 늦게나마 한국어로 발간하는 의의를 풍성히 채울 것임은 꽤나 자명하리라.

* 이 글은 민음사 블로그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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