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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6월 11일 14시 38분 KST | 업데이트됨 2019년 06월 11일 14시 38분 KST

'내조의 여왕' 시대는 가고 '육아 대디' 시대가 왔다

지금 한국에는 3개의 시대가 있다.

외대 통역대학원 재학 시절, 입학설명회에 학생 대표로 나가서 이런 말을 했다. “통대 입시에서는 요행수를 바라지 마세요. 입학보다 더 어려운 게 졸업입니다. 운 좋게 입학해도, 실력이 안 되면 2년 내내 고생만 하다가 졸업도 못 해요. 어쩌면 통대 입학이 행운이 아니라 불운이 될 수도 있어요. 영어 실력에 자신 있는 분만 지원했으면 좋겠습니다.” 희망을 품고 온 많은 통역사 지망생들에게 이런 소리를 한 덕에 나는 미움을 받았다. 그날 나를 처음 본 아내도 ‘뭐 저런 재수 없는 인간이 다 있어?’ 하고 생각했단다. 처음 데이트를 신청했을 때 아내는 단박에 나를 퇴짜 놓았다. “미안하지만, 선배는 내 스타일 아니에요.” 숱한 거절 끝에 5년을 쫓아다니다 결국 결혼하게 됐다.

하루는 후배를 붙잡고 물어봤다. “너 처음엔 나 되게 싫어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나랑 결혼할 생각을 했어?” “음, 선배는 책 읽는 걸 좋아하니까. 항상 볼 때마다 손에 책이 있더라고. 저렇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살다가 아무리 힘든 일이 생겨도, 심지어 감방에 갇혀도, 책만 한권 던져주면 잘 지낼 것 같더라고. 그런 사람이라면 믿고 평생을 의지할 수 있을 것 같았어.” 그 말에 진심으로 감동했다. “고맙다. 나와 결혼해주는 최고의 이유다.”

결혼하고 10년이 흘렀다. 어느 날, 아내가 퇴근하고 집에 오니 사방에 물건이 어질러져 있고 설거지할 그릇은 쌓여 있고 아이들은 울고불고 싸우는데,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책에 빠져 있었다. 그 순간, 속에서 열불이 치밀어 올랐단다. ‘저걸 죽여, 살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이것이 결혼의 핵심이구나. 연애할 때 최고의 장점은, 결혼 후 최악의 단점이 된다.

그 시절, <내조의 여왕>이라는 드라마의 기획안이 들어왔다. 고교 시절 잘나가던 얼짱 날라리가 모범생 전교 일등을 만나 결혼하는 이야기. 바른 생활 사나이인 남편, 직장 생활은 영 꽝이다. 회사에서 입바른 소리만 골라 하다 미움을 사거나 잘리기 일쑤다. 연애할 때 괜찮은 남자, 결혼해서 살아보면 꽝이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자신 ‘내조의 여왕’이 되어 못난 남자를 성공시켜야 한다. 이게 드라마의 기획의도였다.

<내조의 여왕>을 만든 게 불과 10년 전 일인데, 이제는 ‘내조의 여왕’이라는 단어조차 어색한 시대다. 지진이나 화산활동이 잦아 불의 고리라고 불리는 환태평양 조산대는 유라시아판, 북미판, 태평양판 등 3개의 지층이 부딪히는 곳에서 발생한다. 한국 사회 역시 3개의 지층이 한곳에서 만난다. 대가족 중심의 농경 사회, 4인 핵가족 중심의 산업 사회, 그리고 1인 가구가 부상하는 정보화 사회. 서구에서 200년에 걸쳐 일어난 변화가 한국에서는 지난 50년 동안 일어났다.

농경 사회나 산업화 시대를 살아온 어른들의 충고는 지금 이 시대에는 맞지 않는다. 나이 든 어른은 육아가 왜 힘든지 이해를 못 하고, 나이 어린 친구들은 그 힘든 결혼, 출산, 육아를 왜 하는지 이해를 못 한다. ‘내조의 여왕’ 대신, 살림 잘 사는 남자, ‘육아 대디’가 환영받는 시대다. 이런 시대에는 아이를 낳고 기르는 모든 부모가 선구자의 삶을 산다. 선구자란, 누구도 가본 적 없는 길을 가는 사람이다. 선구자에게는 선례가 없고, 정답이 없다. 내가 가는 길이 곧 기준이다.

<내조의 여왕>이 지금 시대에 주는 교훈은, 못난 남자도 여자 하기에 따라 출세시킬 수 있다는 게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살아도 결혼 생활은 힘들다는 것이다. 드라마 <스카이 캐슬>의 진짜 교훈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이가 나를 가장 힘들게 하고, 나를 사랑하는 부모가 나의 삶을 질식시킨다는 것 아니었던가. 나의 행복을 희생하면서까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란 없다. 내조도, 살림도, 육아도,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하면 될 일이다. 3개의 시대가 소용돌이치며 만나온 새로운 시대에 정해진 답이란 건 없다. 다만 행복한 삶을 위해 서로를 응원해 주는 것, 일단 그것부터 시작해보자.

* 한겨레에 게재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