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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7월 24일 15시 35분 KST | 업데이트됨 2019년 07월 24일 15시 53분 KST

53살에 처음으로 혼자 살게 된 후 내가 경험한 것들

이혼을 했고, 아이들이 독립했고, 집의 구조도 달라져야만 했다

ASHLEY COLLINS 제공
함께 사는 고양이 '슈가', 토끼 '코코아', 강아지 '찰리', '행크'와 함께

아래층에서 ‘쿵’ 소리가 나서 잠에서 깬다. 나는 잠시 침대에 누운 채 무슨 소리였을지 생각해 본다. 부엌 카운터에서 고양이가 뛰어내린 소리에 불과했다는 걸 깨닫고 기지개를 켠 다음 마지못해 침대에서 나온다.

아직 밝아지지도 않았다. 찰리가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리더니, 내 침대 아래에 있던 찰리가 여우를 닮은 얼굴을 내민다. 아직은 반쯤 잠든 상태로, 코기 특유의 아이라이너를 그린 듯한 눈을 깜박인다. 나를 따라 화장실에 와서 내가 만져주기를 기다린다.

“좋은 아침.” 나는 찰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매일 밤 찰리가 침실에 있어주는 게 고맙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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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53세 때 혼자 살게 될 거라고는 한번도 생각한 적이 없다. 그럴 가능성조차 떠올리지 않았다. 나는 세 명의 오빠와 다른 친척들, 그리고 잠깐씩 같이 지내다 가는 친구들로 가득한 집에서 자랐다. 부모님이 여러 해 동안 사람들을 미술품 모으듯 모았기 때문에, 손님들도 끊임없이 찾아왔다.

대학교에 다닐 때는 기숙사에서 룸메이트와 살거나 여러 학생들이 함께 사는 집에서 살았다. 졸업 후에는 남자친구와 동거하다 결혼했고, 아이를 셋 낳으며 내 가족이 점점 불어났다.

하지만 세 아이는 자라면서 하나씩 하나씩 떠났고, 남편과는 이혼했다. 그러자 평생 처음으로 진짜 혼자가 되었다. 가족들이 키우던 반려동물들만 남았다. 내가 만든 세계에 아직까지 살고 있는 생명들이다.

찰리와 내가 계단으로 가는데 내 딸 모드의 빈방에서 슈가가 불평하듯 야옹거리며 나온다.

“몇 주 뒤에 돌아올 거야.” 나는 슈가를 안심시켜준다. 하지만 세를 내 살고 있는 이 집에서 막내딸을 위해 내가 직접 개조한 이 방은 이제 모드가 잠시 착륙했다 떠나는 곳일뿐이다. 이제 모드는 늘 대학에 가있다는 걸 나도 알고 슈가도 안다.

나를 따라 부엌으로 온 찰리와 슈가를 밖으로 내보내주고 나이든 검은 래브라도 행크를 부른다. 우리는 함께 토끼 우리 앞을 지난다. 코코아가 앞발을 열린 문 밖으로 내민다. 그게 코코아의 아침인사다.

커피 머신을 켜고 행주 위에 말려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컵을 집는다. 나는 이 낯선 서식지에서 아직도 진화하는 중이다. 식기세척기를 돌릴 만큼 설거지가 많지 않고, 빨래가 너무 적어서 세탁기를 돌리는 것에 환경적 죄책감을 느끼는 새로운 환경. 우유를 꺼내려 냉장고를 열자, 몇 안 되는 식품이 소심하게 놓여있는 것이 눈에 확 들어와 문을 얼른 닫는다.

뒷문에 걸어둔 신발과 코트는 이제 내것뿐이다. 식탁에 책과 종이를 온통 흘려놓곤 하던 배낭은 사라졌고, 아무도 내 전화 충전기를 슬쩍해가지 않는다. 조용해서 주눅이 들기도 한다. 집에 들어올 때 안에서 울려대던 음악도 없고, 목소리를 높일 일도, 큰 웃음소리도, 개가 방귀 뀌었다고 큰소리 치는 일도 없다. 20년 동안 해왔던 일을 그만하게 되고, 내 존재의 이유 자체를 다시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어안이 벙벙해지는 일이었다. 아이들이 하나씩 집을 떠날 때마다 나의 일부를 조금씩 가져갔다. 내 몸이 아직 빈자리를 채울 만큼의 반흔 조직을 만들어내지 못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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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인 깁슨은 자기 음악을 가져갔다. 내 신경이 곤두섰다가도 깁슨이 피아노를 연습하는 소리를 들으면 가라앉곤 했다. 집안에 온통 늘어놓았던 시도 가져갔다. 나는 시들을 읽고 깁슨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고, 깁슨이 마음속에 품은 열정과 복잡함을 볼 수 있었다.

둘째인 웬디는 극단적인 날씨 같던 성격을 가져갔다. 내 힘을 시험하고 어디 한번 감당해보라는 듯했던 거친 폭풍이었다가, 밝고 맑은 날이 되기도 했다. 웬디가 타오르는 듯한 에너지로 채워주던 날들이 사라지니 모든 게 조금 따분하게 느껴진다.

막내 모드는 성숙한 영혼과 현명한 정신을 가져갔다. 가족 중에서 모드만큼 인정 많은 사람은 없었다. 사춘기 동안 오빠와 언니가 싸우는 걸 보며 모드는 건조한 유머와 조심스러운 처신을 익혔다. 나는 눈을 감고 작은 금발 부처 같은 모드가 다리 위에 고양이를 얹고 등을 기대 앉던 모습을 떠올려 본다.

밖에서 찰리가 짖는 통에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정신을 차린다. 동물들을 다시 집으로 들인 다음 커피를 가지고 다이닝 룸으로 간다. 큰 농장용 식탁에 앉아 이제는 가고 없는 아이들이 자기 자리에 남긴 흔적들을 본다. 잔을 두었던 둥근 자국, 긁힌 곳, 부드러운 나무 위에 종이를 놓고 연필로 꾹꾹 눌러써서 새겨진 단어들. 나는 천천히 커피를 홀짝이며 카페인이 내 상실감을 쫓아주길 기다린다.

찰리가 내 발목을 핥고, 나는 손을 뻗어 의자 아래에 누운 찰리를 쓰다듬는다. 찰리는 매일 숲으로 가는 산책을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다. 나는 첫째가 태어난 이후 전업주부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직업이 없지만, 아이들이 다 떠났으니 이제 글쓰기라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나는 밖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찰리와 나가기도 하지만, 어렸을 때 잠시 하다가 40대에 다시 시작한 승마도 한다. 내 말과 나의 관계는 성공적인 운동 파트너이며 경쟁을 즐기는 서로의 마음을 즐겁게 분출하는 사이다. 그리고 나에겐 힐링을 준다. 말은 세라피스트와도 비슷하고, 나를 차분하게 해주는 말의 존재감은 최근 몇 년간 나를 괴롭혔던 마음의 상처와 격한 감정을 상당히 많이 달래주었다.

활기차게 지내고 있고 사람들도 많이 만나지만, 지금도 혼자 사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저녁 시간이 가장 괴롭다.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거나, 음식 냄새가 모두를 부엌으로 불러들이는 일도 없다. 아이들이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려고 개들을 넘어서 내게 오는일도 없다. 행크는 지금도 저녁시간이면 부엌 바닥에 누워서 내가 채소를 썰 때 끄트머리 부분을 던져주길 기다린다. 요리해줄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달으면 행크는 슬픈 눈을 한다. 그게 나를 너무 슬프게 만들어, 나는 냉장고에서 코코아의 먹이인 작은 당근을 한줌 꺼내 행크에게 준다.

잠자리에 들 때 혼자라는 것도 힘들다. 결혼 생활에 문제가 있긴 했어도, 나는 밤이면 침대 속의 다른 몸뚱아리(털없는 몸)의 존재감이 그립다.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 때마침 식탁에 뛰어올라온 슈가에게 말한다. 슈가는 내 품으로 기어들어와 부드럽게 가르랑거린다. 슈가의 등을 쓰다듬으며 내가 원하는 건 육체적 친밀감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도 내가 다른 누군가의 세계의 일부가 아닌 미래를 상상하지 못하겠다. 닻이 사라진 기분이다. 바다에서 표류하는 것 같다. 내가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걸 깨달으니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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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거한지 거의 1년 정도 됐을 때, 이혼 절차를 진행하며 다시 데이트를 시작했다. 내가 잘 아는 것, 즉 애착의 친숙함을 찾으려 했다. 당시 내 나이는 50살이었는데도 데이트하는 법, 가볍게 연락하고 지내는 법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고등학교 때부터 사귄 남자친구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진지한’ 연애를 몇 번 연달아했다. 나는 내가 사랑을 찾는 것이다, 슬퍼서 위안을 찾는 것이다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혼자가 되는 게 두려워서 다른 사람들의 삶으로 뛰어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진실을 깨달을 수 없었다. 텅 빈 내 둥지와 결별 후의 상실감, 동화 속 해피 엔딩이 영영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을 무척 슬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내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일도 겹쳤다. 정서적 안전망도 그때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내 결혼 생활이 서서히 죽어가며, 나는 애정에 굶주릴 대로 굶주린 상태였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짝짓기를 하도록, 연결과 안전을 위해 모여 살도록 프로그램된 군집 동물이지 않은가.

다른 인간에게 보호와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원했지만, 감정적 필요보다 독립을 더 높게 치는 현대 문화와 내가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혼자이고 싶지 않다, 나는 내 삶을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기 때문에 좀 부족하다는 걸 인정하는 게 거의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마치 내 몸이 지금의 사회적으로 우월한 기준에 맞춰 진화하지 못했고 과거와 현재의 진화체 사이에 끼어있는 듯했다.

행크가 걸어와 턱을 내 허벅지에 얹는다. 아침 먹을 시간이 한참 지났음을 부드럽게 알려준다. 행크의 귀를 만지며 두려움이 혼자 있을 수 있는 내 능력을 떨어뜨렸음을 곰곰이 생각해본다. 다른 사람의 맥락 없이 사는 법을 사실 나는 모른다. 공간부터 감정, 꿈까지 모든 것을 공유하고 타협하고, 협상하는데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 새로 관계를 맺으면 너무 빨리 애착을 가져버린다.

내 경고 시스템은 아직 연애에 적합하도록 조정되어 있지 않다. 내가 원하는 미래를 그릴 수 없을 때도 나는 어떻게든 잘 해보려 했다. 나는 성적인 친밀감이 전망이 밝은 장기적 관계와 같은 거라고 믿어버렸다. 함께 보낸 시간도 얼마 되지 않고, 같이 낳은 아이도 없는 사람에게 내 전부를 바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그리고 사실은 그 누구에게도 내 전부를 바칠 필요는 없다는 걸 깨닫는데는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제 나는 내 이혼, 실패했다는 기분, 가족이 깨졌다는 사실에 따라오는 사회적인 수치심들을 쓸어버리고 싶다. 그 ‘깨진 가족’의 어머니인 나는 수치심의 중심에 묶여 있었다. 내 아이들이 견뎠던 상처와 고통이 내 책임이라는 기분을 버릴 수는 없지만, 또한 분노도 느낀다. 우리 가족내에서 내 스스로의 가치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내 자신에게 화가 난다. 나는 다른 모두를 위해, 우리 가족 단위를 위해 25년 동안 가장 열심히 싸웠지만, 지금 나는 혼자다.

빈 의자들을 둘러본다. 내가 잃은 것들이 이 집안에서 메아리친다. 나만의 맥락을 만들어야 할 때라는 걸 깨닫는다. 나는 혼자 살게 되었다는 새로운 상황에 대한 공포와 불안, 심지어 문화적 충격에 의해 가끔씩 마비되곤 했다. 하지만 난 살아남았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독거의 장점도 있을지 모른다. 나는 어디서 어떻게 살지, 누구를, 무엇을 사랑할지 선택할 수 있다. 이제 누군가의 허락을 받을 필요도 없다. 다른 사람의 꿈을 위해 내 꿈을 포기할 필요도 없다. 나는 동물들이 지낼 정원이 딸린 내 집을 사고 싶다. 승마와 글쓰기를 계속하고 싶다. 영원히 혼자이고 싶지는 않다. 나는 친밀한 장기적 관계를 갖고 싶다. 아마 그런 성향을 타고난 것 같다. 하지만 오직 동반자를 갖기 위해 내 전부를 주는 일은 다시는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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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꿈을 갖고 이루지 못했던 옛 꿈을 되살릴 가능성, 혼자라서 가질 자유를 생각하니 희망이 몰려든다. 이 생각을 끊으려는듯 코코아가 토끼 우리 속에서 크게 쿵 소리를 낸다. “갈게!”

개들은 내 목소리를 듣고 희망에 차서 고개를 들고, 슈가는 식탁 밑에서 뛰어나온다. “OK, 가자.” 나는 의자를 밀고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간다. 내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개 두 마리와 고양이의 발톱이 나무 바닥에 닿는 소리가 마치 음악처럼 듣기 좋다.

 

*허프포스트 미국판의 독자 기고 을 편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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