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2019년 08월 21일 18시 03분 KST

남편과 나는 교육이 가난의 탈출구라고 믿었다. 지금은 학자금 빚이 8억이다

삶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Rachel Bevel

오티스와 나는 1990년대에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오티스의 치아 교정기와 큰 귀를 선명히 기억한다. 장난꾸러기였던 오티스가 운동장에서 뛰어다니는 것을 보며 사랑에 빠졌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뛰며 웃을 때 교정기가 햇빛을 받아 빛났다. 땋은 곱슬머리에 끈 없는 K-스위스 신발을 신고 다니는 어린 소녀였던 나는 내 미래를 보고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우리 가족이 오하이오주의 다른 도시로 이사해서 나는 오티스를 다시는 못 볼줄 알았다. 소셜 미디어가 생기자 모든 게 달라졌다. 10년 뒤, 오티스가 내게 페이스북에서 친구 신청을 보내 우리의 운명을 바꾸었다.

2008년 여름은 내 인생 최고의 여름이었다. 우리는 둘 다 18살이었고 다른 대학에 진학했다. 그때 연애를 시작한다는 건 상당히 야심찬 일이었다. 우리 친구들은 다들 미쳤다고 했지만, 옳은 선택이라고 느껴졌다. 오티스는 대부분의 남자아이들과는 달랐다. 그는 16세 때부터 자기가 치과의사가 될 거라고 믿었다. 난 오티스가 함께 성공적인 삶을 만들어 가기 위해 필요한 안정적인 남성이라고 생각했다.

힘들었던 우리의 과거가 둘 사이의 관계에서 추진력이 되었던 것 같다. 나는 클리블랜드 시내에서 자랐다. 우리 부모님은 십대였을 때 나를 낳았고, 난 두 분이 같이 살았던 걸 본 기억이 없다. 난 거의 언제나 어머니와 살았고, 어머니는 혼자서 아이 여섯을 키우며 최선을 다했다. 우리 가족은 생활보조비를 받았고 자주 이사했지만, 부모님은 늘 교육과 경제적 자립의 중요성을 내게 이야기했다.

부모님 두 분 모두 대학 교육을 받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어머니는 헤어스타일리스트가 되었고 아버지는 우편 배달원이었다. 내 조부모님도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노동자였다. 우리 가족은 늘 돈 문제에 시달렸고, 난 어렸을 때도 우리 집의 재정 상태를 알고 있었던 게 기억난다. 부모님이 대학 학비를 댈 방법은 없었다. 학자금 계좌나 신탁 자금은 없었다.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가는데 급급했고, 이 패턴을 깨기 위해 나는 대학교를 선택했다.

반면 오티스는 안정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오티스의 부모님은 결혼 상태를 유지하며 교외에서 살았고, 부동산 중개인으로 성공을 거두어 넉넉한 생활을 했다. 오티스가 12살 때 가족의 안정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티스의 형이 비극적 죽음을 맞고 아버지가 투옥된 것이 시작이었다. 오티스의 어머니는 경기 침체기에 가족을 혼자 힘으로 부양하려고 애썼다. 저축한 돈이 다 날아갔지만 회복은 불가능했다. 오티스와 나는 어렸고, 희망에 가득차 있었고, 우리 부모님들의 실수에서 교훈을 얻으려 했다. 우리가 함께라면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우편으로 받은 브로셔를 읽고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 프로그램을 시작한 오하이오주 마이애미 대학교에 지원했다. 합격했고, 학교가 어디 있는지, 캠퍼스가 어떤 모습인지도 모르는채 입학을 결정했다. 잘한 결정이었다. 학비 대부분이 장학금으로 충당되었을 뿐 아니라 캠퍼스가 아름다웠다. 나는 2012년에 졸업했다. 당시 학자금 대출 금액은 23,025달러 88센트였다. 영문학 학위를 딴 나는 세상으로 나가 잡지계에서 일한다는 꿈을 이룰 준비가 되어있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구직 활동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전혀 몰랐고 시도할 자신감도 부족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티스는 링컨 대학교에서 생물학 학위를 따려면 펜실베이니아에 1년 더 있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클리블랜드의 집으로 돌아가 오티스가 졸업할 때까지 일하기로 했다. 우리는 결혼하고 오티스가 합격하는 치대가 있는 곳으로 가서 살자는 계획을 세웠다.

삶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오티스와 나는 고소득 직업을 구할 수 없었다. 오티스는 학부 과정에서 학자금 대출을 8만 달러 받았다. 치대시험(Dental Admission Test)을 열심히 준비했지만 입학 가능한 점수를 받지 못했다. 나는 작가로서의 내 능력에 의심을 품고 정신건강 분야의 일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오티스와 나는 가족이 중요하다는 것 만큼은 전적으로 동의했다. 우리는 2014년에 결혼했고, 피임을 잘못해서 2015년에 예정에 없던 아이를 낳았다. 아이를 가지려던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가족을 만든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우리가 인생에서 원하는 두 가지는 아이들과 경제적 행복이었다. 나는 아들을 키우기 위해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지내며 가족을 늘릴 계획을 세웠다. 퇴직 후에 강렬한 정체성 문제를 겪었다. 커리어가 없는 나는 누구인가?

소셜 미디어 타임라인을 스크롤하며 나와 다른 사람들을 비교하곤 했다. 남들은 여행하고, 쇼핑하고, 완벽한 가정을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 스크린 반대편의 나는 임신했고 꿈만 가득하고 무일푼이었다. 나는 감정적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나중에 석사 학위를 따러 학교에 들어갔다. 64,595달러 44센트가 들었다. 3년 동안 떨어진 오티스는 치과의사가 되는 걸 포기하고 보건행정 MBA 학위를 땄다. 무려 101,000달러가 들었다. 와, 이 숫자를 타이핑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힌다! 우리를 위해 만들어지지 않은 삶을 쫓았다는 게 우리의 문제 아니었나 싶다.

오티스와 나는 건강하고 교육 받은 흑인 가족이 드문 도시 출신이다. 이끌어 줄 사람이 없던 우리는 지도를 그려가며 성공이라는 목표를 향해 가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우리는 모든 걸 다 잘 해냈다. 대학을 졸업했고, 결혼을 했고, 집을 샀고 아이들을 낳았다. 우리의 커리어는 그에 미치지 못했고, 게다가 268,621달러 32센트라는 학자금 대출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이제 와 돌아보면 우리가 원하는 모든 걸 바로 가질 수 없다는 게 이해된다.

Kiplinger

아메리칸 드림에는 희생이 필요하다. 우리는 사랑과 가족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내 부모님은 부부가 아니었다. 나는 반만 피가 섞인 남매들이 있는 두 집을 오가며 살았다. 나는 내가 가진 적이 없는 모습의 가족을 만들 결심이었다. 내 생각에 미국 문화는 사람의 가치를 숫자로 평가하는 것 같다. 숫자란 신용등급, 월급, 은행 잔고다. 내가 보기에 사랑은 많이들 원하지만 절충이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것 같다. 내가 숫자 기준에 따라 산다면 내 삶은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신과 서로를 향해, 또한 아이들에게 가지고 있는 사랑이 오티스와 나의 희망을 지켜주었다.

오랜 꿈이 다시 솟구쳐 오티스는 마지막으로 치대에 지원했다. 2019년 2월 27일에 합격했다. 아메리칸 드림은 돈이 많이 든다. 오티스가 졸업할 때면 우리 가족의 학자금 대출 총액은 71만8천 달러(한화 약 8억 6300만원)에 달할 것이다. 그러니 버니 샌더스가 당선된다면 학자금 대출 1조6천만 달러를 전부 탕감해주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을 때 내가 얼마나 흥분했겠는가.

남편과 나는 각자의 가문에서 처음으로 대학에 간 사람들이다. 4년제 대학교에 가겠다는 건 우리 둘 다에게 있어 가벼운 결정이 아니었다. 교육은 빈곤의 탈출구였다. 이제 남편은 치대 1학년생이다. 그가 돈을 벌 수는 있지만, 우리는 지금도 엄청난 빚을 지고 있다. 전문 의료인으로 받는 월급도 우리를 구해줄 수 없다. 궁핍함에서 벗어나려 했던 우리는 다시 가난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미국은 평균 학자금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다. 미국은 기회의 땅이기도 하지만 빈곤의 모래구덩이에서 기어나오려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미국에선 아무것도 공짜가 아니다. 오티스와 나는 가난했지만, 미국 시민으로서 열심히 일하고 성공을 거둘 기회를 가졌다. 대학원에 들어가는 것은 불확실한 모험이었다. 남편이 치대에 들어가기까지의 길은 경쟁이 심했고 비용이 많이 들었다. 성공을 향해 올라가는 우리의 사다리는 미끄러웠다.

현재 우리는 두 아이들에게 유익한 삶을 제공해주길 간절히 원하고 있다. 우리 지역 사회에 기여하고, 동네 상점과 기업들을 지원하고 부모님을 돕고 싶다. 일하고 가족을 돕는 우리를 국가가 도와주길 기대했다. 그렇지만 비싼 학비와 높아지는 이자율이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나는 미국인들은 꿈을 주입받은 다음 그 꿈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우리 나라가 서로에게 공감하는 법을 배우고, 금전적 소득보다는 시민을 더 아끼는 나라가 되길 바란다. 미래가 밝아보여야 할 테지만, 지금의 삶은 어두운 터널 속에서 겪는 러시아워 혼잡과 닮았다. 남편과 나는 많은 고생을 경험했고, 인내를 갖고 그 장벽들을 극복했다. 우리 학자금 대출이 탕감되든 아니든, 우리는 평화를 찾았고 천천히 갚아나갈 것이다. 빚을 피할 수 없다 해도 우리의 삶이 빚에 의해 지배받지는 않는다. 우리가 행복해지지 못하게는 하지 못한다.

 

* HuffPost US의 My Husband And I Thought Education Was A Way Out Of Poverty. Now We’re $718,000 In Debt.를 번역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