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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1월 01일 07시 36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3월 03일 14시 12분 KST

디자이너의 새해, 더 멀리! 더 높게!

신문, 잡지, TV, 라디오 등의 전통적인 미디어가 정보의 생산부터 유통, 재생산까지 독점하던 정보 생태계의 주도권 또한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SNS)를 앞세운 디지털 채널에 넘어가면서 언론이 향유하던 '권능'은 디지털 세계에서 활동하는 구성원 모두의 '권리'로 전환됐다. 정보의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위계 관계가 없어지면서 온라인에서 많은 이의 공감을 응집하는 능력만 있다면 그 주체가 누구이든 현실 속 철옹성이 모래성처럼 순식간에 무너지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전종현

미국의 전설적인 디자이너, 레이먼드 로위(Raymond Loewy)가 디자인한 가리비 조개 로고로 잘 알려진 유럽 최대 에너지 기업 '로얄 더치 쉘(Royal Dutch Shell, 이하 쉘)'은 지난 50여 년간 레고(LEGO)와 밀월 관계를 맺어왔다. 1970년부터 레고는 쉘 로고가 등장하는 에디션을 출시하기 시작했고, 쉘 로고가 박힌 레고 페라리(LEGO Ferraris) F1 미니카는 2012년 이후 지금까지 무려 1천 600만 개 이상 배포됐다. 원유 시추 때문에 낙인찍힌 '불량 기업' 이미지를 동심의 대명사인 레고의 브랜드 파워로 희석하려는 포석이었다. 그런데 두 기업의 오랜 협력 관계가 지난 10월 8일 아작이 났다. 환경 보호 단체 그린피스(Greenpeace)가 7월 초 유투브에 올린 동영상, '모든 것이 최고는 아니에요(Everything is NOT awesome)' 때문이다.

2분이 채 안 되는 짧은 영상에는 레고 인형과 블록으로 재연한 북극의 자연, 동물, 사람, 그리고 쉘의 원유 시추기가 등장한다. 어디선가 갑자기 밀려들기 시작한 시꺼먼 액체는 모든 것을 질식시키듯 먹어치우다 종국에 단 한가지만 남겨 놓는다. 바로 원유 시추기 꼭대기에 달린 쉘의 깃발이다. 가리비 조개 로고를 선명히 드러내며 쉘의 생존을 신고하는 장면에서 그린피스는 돌직구를 던졌다. '쉘은 아이들의 상상력을 오염시킵니다. 레고에게 쉘과의 제휴를 청산하라고 말해주세요'.

북극 생태계가 원유 유출 사고로 파탄에 빠지는 미래 모습을 레고로 적나라하게 구현한 영상이 SNS를 통해 야금야금 퍼지자 생각치 못한 후폭풍이 불었다. 영상을 접한 사람들이 그린피스가 제안한 청원서에 동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명에 참여한 인원이 100만 명을 넘어가자 궁지에 몰린 레고는 결국 쉘과 공동으로 진행하던 프로모션을 종결한다고 공표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낸 잘 만든 온라인 영상 한 편 때문에 수십 년 간 확고한 브랜드 가치를 구축해온 기업이 1200억 원이 넘는 막대한 돈을 포기한 이번 사건은 21세기 들어 빠르게 바뀐 정보 생태계의 특징을 온전히 보여준다. 블록마다 선명히 박힌 레고 로고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영상 속 장면이 앞으로 망상으로만 남지 않을 것이라는 냉엄한 교훈과 함께.

예로부터 권력을 구축하고 지탱하는 그 원천에는 정보가 있었다. 별과 달의 움직임을 기록한 천문 지식은 왕의 신성을 뒷받힘하는 권능의 상징이었고, 국가의 광역을 파악하고 지리를 기록한 지도는 최고 수준의 군사 비밀로 여겨졌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배층은 한문, 라틴어 등 일반 대중과 유리된 언어로 고급 지식을 정리해 서로 공유하며 그들의 위치를 공고히 했다. 이렇게 폐쇄성을 바탕으로 한 정보 생태계의 패러다임이 처음으로 바뀐 기점은 15세기다. 독일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를 시작으로 유럽에 금속 활자가 보급되며 수많은 서책이 만들어지고 유통되면서 정보에 대한 대중의 접근성이 획기적으로 높아졌다. 지난 1999년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해 과거 1000년 간 인류 문명을 뒤바꾼 결정적 순간으로 '금속 활자의 등장'이 선정된 사실은 정보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구텐베르크 이후 수백 년 동안 유지되던 기존 정보 생태계가 근래 혁신적으로 요동치고 있다. PC와 인터넷 개발에 이어 2007년 아이폰의 등장에서 촉발한 스마트폰의 급속한 보급은 21세기 인류가 언제 어디서나 거대한 지식의 바다를 헤엄치며 실시간으로 발생하는 새로운 정보에 곧바로 접속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신문, 잡지, TV, 라디오 등의 전통적인 미디어가 정보의 생산부터 유통, 재생산까지 독점하던 정보 생태계의 주도권 또한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SNS)를 앞세운 디지털 채널에 넘어가면서 언론이 향유하던 '권능'은 디지털 세계에서 활동하는 구성원 모두의 '권리'로 전환됐다. 정보의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위계 관계가 없어지면서 온라인에서 많은 이의 공감을 응집하는 능력만 있다면 그 주체가 누구이든 현실 속 철옹성이 모래성처럼 순식간에 무너지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게다가 정보 생산의 제약이 사라지고 유통 인프라의 문호가 활짝 개방되자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수백 년 전만 해도 정보에 대한 접근성이 너무 낮아서 문제였다면 지금은 도리어 매일 정보의 범람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질식사를 걱정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이런 변화는 기업들에게 또 다른 위기이자 기회가 됐다. 이제 브랜드는 디지털 채널을 통해 각자의 잠재적 소비자에게 직접 다가가 제 목소리를 내는 게 가능해졌다. 미디어가 누리던 특권의 민주화가 한 명의 시민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종전이라면 미디어에 대한 막대한 투자가 선행된다 하더라도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매번 휘발되기만 하던 미디어 비용으로 소비자의 숨겨진 니즈를 충족하는 맞춤형 콘텐츠를 만들어 이를 디지털 허브를 통해 확산시키는 시스템에 촉을 세우기 시작한 기업의 등장은 새로운 부류의 유사 미디어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현실의 교훈은 명확하다. 과거 정보 생태계에서 중요했던 것은 생산과 유통에 필요한 인프라의 유무였다면, 그 금전적인 진입장벽이 와르르 무너진 현 상황에서는 잠재적 소비자들의 자발적인 호응을 이끌어내고 그들의 궁금증을 알아서 긁어줄 수 있는 맞춤형 콘텐츠의 존재가 선택이 아닌 필수 요소로 간주된다. 즉 사람들의 인지 범위에 손쉽게 진입하며 일상의 행동까지 자발적으로 이끌어내는 '웰-메이드' 콘텐츠가 당면한 혼란을 풀어갈 핵심 열쇠로 떠오르는 것이다. 수많은 콘텐츠들이 군웅할거하는 이 혼란의 전장에서 제 깃발을 높이 세울 웰-메이드 콘텐츠를 옹립하고 보필할 만한 인재는 과연 누구일까. 나는 정확한 메시지의 전달, 신선하고 독창적인 상상력, 그리고 진정성 있게 사람을 매혹시키는 방법을 매순간 고민하는 디자이너야말로 현대판 '삼고초려' 목록의 가장 앞 단에 자리잡아야 한다고 믿는다.

더불어 정보 생태계의 패러다임이 변하는 현 시대는 디자이너에게 역사상 유례 없는 진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콘텐츠에 매력을 불어넣는 독보적인 구현력을 갖춘 디자이너가 만약 콘텐츠 방향을 명확하게 제시하는 기획력과 정보 생태계의 유지에 필요한 상호간 커뮤니케이션의 능력까지 겸비할 때 동시대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영감을 주는 '인플루엔서(influencer)'로 탈바꿈하는 기회 말이다. 앞으로 디자이너는 취직을 잘하고, 이직이 원활하며, 높은 연봉을 받는 현실적인 영역과 더불어 좀 더 확장된 운신의 폭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물론 지금 당장 눈 앞의 문제가 숨통을 조일 테지만 지금껏 디자이너에게 허락조차 되지 않았던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기회를 놓치는 것은 미래를 포기하는 것과도 같다. 변화의 물결을 놓치지 않고 '대오각성'을 하려면 두려움을 딛고 현실을 뛰어넘는 용기가 필요할테다. 그러니 제발 디자이너들이여, 2015년에는 각자를 믿고 자신의 위대함을 찾아보자. 그리고 마음껏 야망을 꿈꾸자. 우리는 이제 먼 동이 트는 새로운 세계로 비상할 자격이 있다. 더 멀리! 더 높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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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CA Korea 11월호 'Insight'에 기고한 칼럼을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